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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비재에서의 여름 – 전파 없는 마을에서 찾은 진짜 쉼

lala-news 2025. 7. 14. 00:28

올여름엔 어디 멀리 떠나지 않기로 했다. 바다도, 해외도 아닌 조금 더 조용하고, 내 마음과 가까운 곳을 찾고 싶었다. 어느 날 문득 생각났다. 예전에 딸과 함께 다녀온 인제의 작은 마을. 전파도 잘 안 터지고, 시냇물 소리만 가득하던 그곳.
그 마을 초입에 있는 민박집, 이름도 참 예뻤다. ‘하늘비재’. 그때는 그냥 하룻밤 머물렀지만, 마음 한구석에 그 풍경이 오래 남아 있었다.
다시 그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스마트폰은 가방에 넣고, SNS도 이메일도 잠시 멈췄다. 이번 여름휴가는 세상과 단절하고, 오직 나 자신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랐다.

자작나무숲
자작나무숲길

전파 없는 마을, 그 낯설고 반가운 고요함

인제 읍내를 지나 굽이굽이 산길을 돌자, 도로는 점점 좁아졌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도시의 어떤 광고보다도 평화로웠다. “신호 없음”이라는 휴대폰 화면을 보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하늘비재는 계곡과 자작나무숲 사이에 있는 작은 민박이었다. 오래된 목재 향이 나는 집. 주인장은 여전히 따뜻한 웃음으로 나를 맞이했다.
“이번엔 혼자 오셨어요?”
“네, 조용히 쉬고 싶어서요.”
짐을 풀고 마루에 앉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자작나무 잎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근처 계곡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무언가를 검색하려 휴대폰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이곳에서만큼은 검색보다 사색이 더 어울렸다.

 

자작나무숲에서의 맨발 걷기 – 땅을 느낀다는 것

다음 날 아침, 하늘비재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자작나무 숲으로 향했다.
이곳은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아 사람도 많지 않았다. 숲 입구에서 신발을 벗었다. 맨발로 걷는다는 건 생각보다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땅의 온도, 질감, 습기. 발바닥은 그 모든 걸 정직하게 느꼈다.
자작나무 사이로 햇살이 뿌려졌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작은 풀벌레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잠시 숲 한가운데 멈춰 섰다.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며 눈을 감았다.
아무 소리도 없는 듯하면서도 수천 가지 자연의 소리가 쏟아졌다.
그 순간 나는 내 생각과 감정도 함께 흐르고 있다는 걸 느꼈다.
도시에선 놓치고 살았던 것들.
생각이 많을 때일수록 걷는 게 도움이 된다고 했던가.
발로 걷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걸었던 시간이었다.

 

계곡에서의 명상 – 물소리에 내 마음을 맡기다

숲에서 내려와 근처 계곡으로 향했다. 바위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발을 살짝 물에 담갔다. 계곡물은 놀랄 만큼 차가웠지만, 그 찬 기운이 정신을 맑게 했다.
나는 바위에 앉아 눈을 감고 귀를 열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리듬을 타듯 귓속으로 들어왔다.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 마음이 편해졌다.
그냥 앉아 있었을 뿐인데, 머릿속 생각들이 줄어들고 있었다.
지금 내가 뭘 고민하고 있었지?
잠시 잊었다.
스마트폰도 없고, 누구에게 보여줄 사진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시간.
이 시간은 그 자체로 완벽했다.
자연 앞에선 애써 꾸미지 않아도 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충분했다.

 

청국장
청국장

자작나무숲 앞 청국장집, 기억보다 더 진했던 그 맛

걷고, 쉬고, 명상한 후 어느덧 배가 고파왔다. 예전에 딸과 함께 갔던 자작나무숲 앞 청국장집이 떠올랐다. 간판도 소박하고, 마당엔 콩을 말리는 평상이 있었다.
직접 띄운 청국장으로 끓인 된장찌개는 진하고 구수했다. 마치 이 동네 공기 맛이 나는 것처럼, 깊고 담백했다.
주인 할머니는 여전히 정겨운 인사로 맞아주셨다.
“그때 그 아가씨? 딸하고 왔었지?”
“네,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짧은 인사 한마디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여행지에서 다시 만나는 얼굴만큼 반가운 것도 없다.

 

하늘비재의 밤, 별빛과 마루와 나

저녁 무렵, 다시 민박으로 돌아왔다.
주인장이 남겨둔 쑥차를 마루에 앉아 천천히 마셨다.
노을빛이 자작나무 사이로 흘러들고, 계곡소리는 낮보다 더 부드러워졌다.
나는 이불을 마당으로 가져와 누웠다.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별들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폰도, 음악도 없었지만 이 밤은 꽉 찼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내게 가장 필요한 시간이었음을 알았다.
하늘비재의 고요한 밤은 그렇게 내 하루를 따뜻하게 감쌌다.

 

돌아오고 싶은 마음, 남겨두고 온 나

이틀밖에 되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그 시간이 내 마음에 남긴 여운은 길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다시 ‘연결된 세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엔 여전히 ‘전파 없음’의 공간이 남아 있다.
언제든 다시 돌아오고 싶다.
그때는 딸과 함께, 아니면 혼자서라도.
내가 나를 가장 잘 만날 수 있었던 그 하늘비재로.